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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린 소리는 어디로 갔나 — 박정희 시대, 금지가 빚은 사운드

어두운 배경에 놓인 빈티지 릴테이프 녹음기.
Photo: Ignat Kushnarev · Unsplash

금지는 소리를 없애지 못한다. 형태를 바꿀 뿐이다. 국가의 손이 가사를 누르자, 소리는 은유로·연주로·지하로 굴절했다. 박정희 시대의 어떤 사운드는 자유의 산물이 아니라 억압의 산물이었다.

By @coldsurf2026.07.06Mind Magazine@coldsurf사람이 직접 쓴 글

한 시대의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보통 그 소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묻지 않는다. 좋으면 명곡이라 부르고 넘어간다. 하지만 소리에도 지문이 있다. 그 시대가 무엇을 허락하지 않았는지가 소리의 형태에 새겨진다. 박정희 시대 대중음악이 그렇다. 우리가 그 시절 명곡이라 부르는 소리들 중 일부는, 자유롭게 흘러나온 게 아니라 눌린 자리를 비껴 흐르다 굳은 형태다. 역사가 먼저고, 소리는 그 역사의 지문이다.

국가의 손

먼저 눌렀던 손의 모양을 봐야 한다. 개발독재기의 대중음악은 여러 겹의 통제 아래 있었다. 1975년 6월 22일, 문화공보부의 '공연활동정화대책'에 따라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이미 시중에 나와 있던 대중가요를 다시 심의해 공연·방송·판매에서 금지하기로 결정한다. 1차로 음반 141장에 실린 1,392곡 가운데 43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됐고, 이 시기부터 1985년까지 국내곡 837곡이 방송에서, 그중 382곡이 공연·음반판매에서도 금지됐다.

금지의 언어는 종종 음악 바깥에서 왔다. 문공부가 밝힌 주된 사유는 왜색풍, 창법 저속, 불신 풍조 조장, 퇴폐성이었다. 1975년 이전의 금지가 주로 왜색과 표절을 겨눴다면, 이때부터는 '저속'과 '퇴폐'가 규제의 주된 명분이 된다. 심의는 곡을 살리거나 죽였고, 죽이는 언어는 대개 미학이 아니라 풍기의 언어였다.

같은 해 12월, 통제는 인신에까지 미친다. 이른바 대마초 파동이다. 이장희·윤형주·이종용의 구속 보도를 시작으로 신중현·김추자를 비롯한 다수의 음악인이 구속되거나 출연정지를 당했고, 이듬해 문화공보부의 지시로 한국연예협회는 신중현·윤형주·이장희 등 54명을 제명한다. 1976년에는 대마관리법이 제정돼 처벌의 근거가 강화됐다. 마침 1975년은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고 인혁당 관련자 사형이 집행된 해였다 — 국민의 시선을 정치에서 연예계 추문으로 돌리려는 조치였다는 시각도 있다. 여기에 더해, 대부분의 가요 음반은 맨 마지막 트랙에 국가가 정한 건전가요를 의무적으로 실어야 했다. 소리의 그릇 자체에 국가의 목소리가 심긴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통제가 개인의 악의였는지가 아니다. 저격할 인물을 찾는 글이 아니다. 중요한 건 개발국가라는 구조가 대중의 정서를 관리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관리의 손길이 소리의 형태를 바꿨다는 사실이다.

굴절 하나 — 가사가 은유로 접힌다

검열이 가장 먼저 겨눈 것은 말이었다. 직설이 막히자 소리는 은유로 접혔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그 극단적인 사례다. 1971년에 발표된 이 곡은 1973년 정부가 도리어 건전가요로 지정했다가, 1975년 금지곡으로 뒤집혔다. 흥미로운 건 금지의 방식이다 — 수천 곡을 사회 통념 위반이니 근로 의욕 저하니 하는 명분으로 묶던 시절에, 「아침이슬」만큼은 구체적 사유조차 명시되지 않은 채 금지됐다. 가사는 아침 이슬과 붉은 태양 같은 풍경뿐인데, 그 추상 속에서 억압과 해방의 뉘앙스가 읽힌다는 이유였다. 말할 수 없음이 서정을 낳고, 그 서정이 다시 불온으로 지목되는 회로. 모호함은 미학이기 이전에 생존의 형식이었다.

같은 회로가 반대 방향으로도 돌았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1974년 발표 당시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라는 대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방송에서 밀려났다. 그런데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이 후렴이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로 개사돼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풍자하는 노래로 불리자, 곡은 활동금지의 낙인까지 얹는다. 같은 멜로디가 풍기의 이름으로도, 정치의 이름으로도 금지된 것이다 — 가사가 손에 잡히는 순간 국가가 그것을 어떻게든 쥐려 했다는 증거다.

굴절 둘 — 소리 자체가 말을 대신한다

가사가 위험하면, 연주가 말한다. 신중현이 그 전환의 상징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유신 직전인 1972년 청와대로부터 박정희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라는 요청을 받고 거절했고, 여당의 압박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다. 대신 그는 권력자가 아니라 강산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든다. 그렇게 1972년 10월에 나온 곡이 「아름다운 강산」이다.

이 곡을 들으면 왜 신중현의 무기가 결국 기타였는지가 들린다. 왜곡된 톤과 길게 뻗는 연주는 검열이 붙잡을 언어가 없는 자리였다. 말은 심의할 수 있어도, 기타의 굉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규정하기 어렵다. 물론 권력은 그를 다른 방식으로 눌렀다 — 「아름다운 강산」 이후 신중현은 방송의 금기가 되었고, 다수의 곡이 금지곡으로 묶였으며, 대마초 파동을 거치며 방송과 업소 출연까지 막힌다. 하지만 그가 남긴 소리의 밀도는 그대로 남았다. 그 시대 한국 록의 어떤 강렬함은 자유의 표현이 아니라 말이 막힌 자리에서 소리가 대신 낸 압력이었다.

굴절 셋 — 무대에서 지하로

살아남지 못한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대마초 파동으로 제명되고 활동을 봉쇄당한 이들은 방송과 큰 무대에서 밀려나, 소극장과 다방,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통로로 옮겨갔다. 지상에서 지워진 만큼 지하에서 조밀해졌다. 공적 공간에서 허락되지 않은 정서는 사적 공간의 밀도로 응축됐다.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이 한국 대중음악에서 갖는 특유의 무게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기 강제된 이주의 흔적이다.

자유가 아니라 억압이 빚은 미학

그래서 이 시대의 소리를 들을 때는 두 번 들어야 한다. 한 번은 아름다움으로, 한 번은 그 아름다움이 어떤 눌림을 비껴서 생겼는지로. 은유의 여백, 연주의 압력, 지하의 밀도 — 우리가 그 시절 명곡의 미덕이라 부르는 것들 중 일부는 억압의 지문이다. 자유롭게 태어난 게 아니라, 눌린 자리를 피해 흐르다 그 형태로 굳은 것이다.

이건 억압을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정반대다. 소리의 형태를 되짚으면 눌렀던 손의 모양이 드러난다. 미학을 통해 구조를 읽는 것이다. 이 곡들이 1987년에야 무더기로 해금됐다는 사실은, 그 손이 얼마나 오래 소리 위에 얹혀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오늘의 물음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소리에는 그것을 빚은 힘의 지문이 함께 남아 있다. 명곡의 목록만 외우면 그 지문은 지워진다. 한 시대의 그림을 볼 때 그 아름다움이 어떤 힘의 지도 위에서 태어났는지를 함께 봐야 하듯, 이 시대의 노래도 그렇다. 그림을 역사로 읽듯, 소리를 역사로 듣는 것 — 그게 이 시리즈가 하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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