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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 Mind

여건이 안 된다는 당신에게 — 폐허의 홍대가 낸 소리

붉은 조명이 드리운 어둑한 무대 위에 홀로 선 마이크.
Photo: Erwi · Unsplash

자원이 없어서 못 만든다는 사람은, 자원이 생겨도 만들지 않는다. 없음은 시작을 막은 적이 없다. 그저 소리의 형태를 정할 뿐이다.

By @coldsurf2026.07.06Mind Magazine@coldsurf사람이 직접 쓴 글

당신은 여건이 안 된다고 말한다.

돈이 없어서. 장비가 없어서. 판이 없어서. 그 말은 언제나 사실이다. 그리고 언제나 핑계다.

없음은 시작의 반대말이 아니다. 없음은 재료다. 문제는 당신이 그것을 핑계로 쓰느냐, 재료로 쓰느냐뿐이다.

이 문장을 증명한 시간과 장소가 있다. 나라 전체가 가장 가난했던 해, 서울의 한 동네다.

없음은 시작을 막은 적이 없다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렸다. 온 나라가 허리띠를 졸랐다. 직장이 사라지고, 지갑이 얇아지고, 청년에게는 갈 곳 없는 시간만 남았다.

그런데 그 얇아진 나라의 한복판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홍대 앞이다.

먼저 거짓말 하나를 걷어내자. IMF가 이 소리를 만든 게 아니다. 홍대 앞 첫 클럽 '발전소'는 1992년에, 인디의 심장이 된 라이브클럽 '드럭'은 1995년에 문을 열었다. 델리스파이스는 1995년에 모여 그해 드럭 무대에 섰고, 데뷔 앨범은 위기가 오기 석 달 전인 1997년 8월에 나왔다.

씬은 위기보다 먼저 있었다. IMF는 그 소리를 만들지 않았다. 이름을 줬을 뿐이다.

여기서 배울 것이 있다. 좋은 것은 여건이 갖춰진 뒤에 오지 않는다. 여건이 무너지는 동안에도 이미 자라고 있다. 당신이 "때가 되면"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결핍은 형태를 준다

돈이 빠진 자리에는 두 가지가 남는다. 값싼 공간과, 남아도는 시간.

홍대가 예술가를 끌어들인 이유는 낭만이 아니다. 임대료가 쌌고, 미술대학이 가까웠다. 큰 자본이 거들떠보지 않는 동네였다는 사실이 조건이 됐다.

비싼 스튜디오도, 대형 기획사도 없이 소리를 만들어야 했다. 거칠게 녹음하고, 짧게 지르고, 스스로 찍어냈다. 그 제약이 그대로 양식이 됐다.

이것이 핵심이다. 결핍은 당신의 소리를 죽이지 않는다. 당신의 소리에 형태를 준다. 매끈할 자원이 없으면, 매끈하지 않은 것이 서명이 된다.

1998년, 나라가 바닥을 치던 해에 크라잉넛의 「말달리자」가 나왔다. 이 곡은 지쳐 있지 않다. 느리지도 않다. 폐허를 질주한다.

닥친 현실을 분석하는 대신 "말달리자"라고 외쳐버리는 단순함. 분석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던 시절, 그 단순함이 곧 대답이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분석만 하고 있나. 외쳐버려도 될 것을.

두 갈래

같은 위기가 두 자식을 낳았다.

위로는 자본이 재편한 문화산업. 시스템으로 스타를 길러 수출품으로 내보내는 길. 결핍을 규모로 덮으려는 쪽이다.

아래로는 홍대의 씬. 자본이 비켜간 자리에서 스스로를 만드는 길. 결핍을 양식으로 끌어안은 쪽이다.

두 길 다 살아남았다. 하지만 결핍이 소리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는지는 아래쪽에서만 보인다. 산업은 결핍을 지우려 하고, 씬은 결핍을 새긴다.

당신이 만드는 것은 어느 쪽인가. 없음을 덮고 있나, 새기고 있나.

미화하지 마라

여기서 멈추면 값싼 위로가 된다. 그러니 정직하게 마감하자.

결핍은 대부분의 소리를 태어나기도 전에 죽였다. 당신 귀에 닿은 것은 그 결핍을 견뎌낸 예외들이다. 살아남은 것만 보고 "가난이 예술을 낳는다"고 말하면, 그건 죽은 것들에 대한 모욕이다.

결핍은 축복이 아니다. 핑계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조건이다. 당신이 그 조건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유일한 변수다.

이제 당신 차례다

한국에서 '인디'라는 말이 유통 방식 이상의 무게를 갖는 것은 이 시기의 토양 때문이다. 그것은 취향이기 이전에 결핍의 기억이다.

씬은 정리해야 할 무질서가 아니라 발견해야 할 토양이다. 폐허가 남긴 교훈이 있다면, 자본이 비켜간 자리를 결핍으로만 볼지 가능성으로도 볼지의 물음이다.

오늘 당신이 "돈이 안 된다"고 부르는 그 자리. 그 문장은 1998년에도 똑같이 참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누군가는 소리를 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핑계로 쓰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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