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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ction · Catholic

계시와 성사: 신학적 미학

빛이 스며드는 어두운 대성당 내부
Photo: Old Youth · Unsplash

참됨·좋음·아름다움. 그 역방향에서 시작되는 신앙

By @coldsurf2026.06.09사람이 직접 쓴 글

본 글은 전인걸 요한 보스코 신부님의 신학 강좌를 듣고 한 청자로서 정리한 글입니다. 강의 내용 자체의 저작권은 신부님께 있으며, 제 이해의 한계로 인한 오해·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적절한 부분이 있으시면 알려 주시면 수정·삭제하겠습니다.

계시 (Revelatio)

계시란 무엇일까요? 가톨릭은 보편적으로 계시 종교라고 많이들 말합니다. 계시 = Revelatio = '드러냄'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이고, 영어로는 Revelation에 해당합니다.

계시 종교라 함은 본래, 내가 무엇인가를 찾아 나가 알게 되는 자연 종교에 반대되는 의미가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아래와 같아요.

  •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
  • 하느님께서 인간과 친교를 맺으시는 것

대대로 이어지는 계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의 나이가 약 70세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이 말씀은 "네가 그 땅으로 가게 되면, 대대로 나를 하느님이라 부르게 하겠다"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뒤를 모세가, 모세 이후에는 이사야 등 여러 예언자가 이었고, 그 마지막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지요.

성사 (Sacramentum)

성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느님께서 지속적으로 사랑을 인간에게 전해 주시는 방법이기도 하지요.

하느님의 성사 = 예수 그리스도

위의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어 주신 예수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이는 원성사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말이 있지요.

그리스도의 성사 = 교회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셨고, 이는 근본 성사에 해당합니다.

성사의 구성 요소

성사의 구성 요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 외적 실재: 질료와 말씀
  • 내적 실재: 은총

성체성사를 예로 들면, 빵과 포도주를 질료로, 복음을 말씀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성사를 통해 영성체를 함으로써 은총을 얻게 되지요.

이는 다시 실체 변화사효성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사효성의 개념은,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이므로 집전자 개인의 거룩함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신부님이라면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집전자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므로 사효성이 발생한다는 뜻이지요.

신비로 드러난 그리스도는 거룩함을 상징하고, 거룩함은 곧 성사로 이어지며, 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도록 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실제 계시와 성사가 내 삶 안에 살아 있는가?

성사와 계시에 대한 개략적인 이론은 위와 같은데, 그럼 이것이 진짜 내 삶 안에 살아서 꿈틀댈까요?

계시는 앞서 말했듯 '하느님께서 나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가?'에 해당합니다. 성사는 앞서 말했듯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머무시는가?'에 해당합니다.

사실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선에서 끝난다면, 차라리 성경책을 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verum, 즉 존재의 참됨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통해 "아는 것"에 해당해요.

그렇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행동할 수 없겠지요. 행동하려면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bonum, 즉 존재의 좋음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면, 미사를 드릴 때의 정갈한 마음가짐에 해당해요.

그럼 이제, 알았고 마음가짐도 정갈하게 가졌습니다. 그런데 뭔가 공허합니다. 이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pulchrum에 해당합니다. 즉, 존재가 지닌 아름다움입니다. 이는 머리로, 마음으로 알고 느끼는 것을 넘어서는 직관의 영역에 해당해요. 예를 들면, 아기를 볼 때, 자연경관 앞에서 감탄할 때, 혹은 취향에 맞는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등에서 이 직관이 발휘됩니다.

아름다움 → 좋음 → 참됨

우리는 대부분 무엇인가를 배울 때, 이론을 배우고 태도를 배우고 실습하며 알아 갑니다. 그런데 신앙에 발을 담근다는 것은 이와 반대로 가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해요. 무엇인가 실체를 알기 전에 신앙의 아름다움에 먼저 매료되고, 그를 통해 사유하며 좋음과 참됨을 배우기도 하지요.

결국, 손익을 따져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미학을 먼저 느끼며 경외심과 감탄으로 따르게 되는 힘이 바로 신앙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직관의 눈으로 하느님의 미학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지요. 예를 들어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어부였던 베드로는 알아본 것처럼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진리를 설명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능력은 잃어버렸다.

계시는 하느님이 보여 주시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응답하는 사건이다.

또한 강의 중에는, 발표하신 신부님께서 오랜 기간 한 분의 지도교수님 곁에서 논문을 쓰셨고, 그분의 태도를 가까이서 경험하며 훗날 자신이 가르치는 자리에 서게 된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는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이야기를 잠시 나누어 주셨습니다.

태도에 대해 직접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참되고 아름다운 태도를 알아본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 미학에 동화되는 것이지요. 응답이란 가르침이 아니라, 알아봄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AI는 직접 기도할 수 없지요.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몫입니다.

결국 계시는 하느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사랑이며, 응답은 그 사랑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이고, 성사는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 곁에 머무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연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저는 이 강의를 듣고 마지막에 이런 한 줄 정리가 떠올랐습니다.

머리가 아닌 직관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

저의 일상에서라면 아마 음악이 여기에 해당할 것 같아요. 저는 예술을 좋아하지만, 음악을 좋아하고 즐기는 만큼 미술을 자주 접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미술은 비교적 머리로 느끼게 되는 반면, 음악은 비언어적인 요소를 통해 다가오는, 저에게 가장 직관적인 매체였거든요. 그래서 음악에 가장 끌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생각하는 상태. 이념과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그 상태를 유지하며, 하느님이 주신 고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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